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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하고자 함으로 충분치 않다. 실제로 행해야 한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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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동기부여와 해결해야 할 욕망은
여자에 대한 피해의식과 보상심리
심리학의 트랜스... 난 지금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진실에 휘둘려 나 혼자 망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부모의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정서적이고 육체적인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킬 줄 모르는 부모는 자녀의 욕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물론 이런 부모도 처음부터 나쁜 의도를 가지고 아이를 키운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자녀를 사랑했을 뿐이다. 하지만 자라는 아이의 마음속에 깊이 남겨진 욕구불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부모의 부정적인 평가를 그대로 수용해 자신은 어떤 일에도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항상 불만에 가득차 있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익숙한 대로 물질적인 충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사치와 향락, 약물복용, 인터넷, 음란물 등 여러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근원적인 해결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한순간의 위안일 뿐, 마음의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는 않는다. 대리만족, 합리화로 내면의 욕구를 채우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대체로 성인이 될 즈음 자신의 능력으로는 내적인 갈망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신은 인간으로서 실패자라는 생각으로 자신감을 상실하거나 자기 비하에 빠진다. 갈수록 '변덕스러운 요구'를 해대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시달리면서 피해의식은 점점 깊어진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외부에서 찾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신의 결핍된 것을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대른 사람들이 갖고 있다고 믿는다.(책, 요술망치, 멘토, 등등..)
한 줄의 문장이지만 그 파급력과 흡입력은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수 있다. 이상형을 설정한다는 것은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이룰수 없는 부분을 그 사람이 대신 함으로써 만족하려는 합리화와 같은것이다. 깨어 있는 내내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사람이 나로 나였다..위로 받고 싶어하고,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의 속 내를 100센트 알 수가 없다. 그걸로 나는 다시 의기소침해진다.
다들 잠든 채 걸어다니는 것처럼 사니까, 우린 세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지. 왜냐면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면서 반쯤 졸면서 살고 있으니까 죽음에 직면하면, 모든것을 다 벗기고 결국 핵심에 초점을 맞추게 되지. 자기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매사가 아주 달라 보이는 법이거든. - 모리와 함꼐한 일요일
제 아무리 퇴폐적이고 소비적인 활동도 '취미'라는 명목하에 아무렇이 않은듯 버젓이 행하고 있다.. 취미면 다 용서 되는 아이러니. 퇴폐적이고 쾌락적인 것에는 중독성이 있다. 금전적인 손실이 필요 없으며 시간적인 투자도 필요없으며 정신적인 에너지도 그다지 낭비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간편하고 쉽게 즐기며 집안에서 편히 지낼수 있게 된다. 그것이 버젓이 취미라 명명 이름지으며 뻔뻔히 즐기고 있다. 무책임하고 위기의식이란 가질 수 없으며 어떠한 생산적인 발전도 없게 된다.
위기의식, 생존의 위협, 안정성, 살고자 하는 욕구, 자신의 자리가 없어질거라는 불안감은 좋은 의미에는 발전할 수 있는 자극, 동기 부여가 되고 나쁜 의미에는 일상의 긴장감이란 것이다. 여유로움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바보로 만든다. 바보상자, 게임, 컴퓨터, 인터넷 중독과 같은 것
시간이 많고 정신없이 지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분별된 마음이 생기게 된다. 하루가 빡빡하고 어느것도 신경쓸 여를이 없다면 다른 곳을 돌아 보기가 힘들다. 한가지에 오래도록 집중한다는 것은 분명 힘이든다. 그래서 밖으로 햋볕도 보고 다른이들과 연결도 지으며 지금 집중해야 하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다. 그런 의미에 상처와 과거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고 그 여유가 없어진다면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잠재의식에서 자연히 잊혀지고 치유하게 된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이 전부인냥, 내 스스로가 날 잡아 먹어서는 안된다. 환상과 편견을 가진 눈으로 세상을 보지마라. 세상의 의미는 다른 어떤 특별한게 있는것이 아니다. 네가 마음먹은 대로 행동한 대로 이루어 질뿐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섭고 몸이 떨릴 정도의 죽음을 각오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떠한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살기 위한 몸부림을 쳐본적이 있는가? 살아있는것 자체가 감사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이 모든게 사라지는 이유는 분별심-망각이다. 사는것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의 즐겁고 행복한 기억은 얼마가지 못한다. 인간은 이내 순식간에 적응해 버리고 지루해져 버리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의식적인 습관, 정신적인 버릇이 필요하다. 밝아 지려는 노력, 아니 노력이라기 보다 정신적인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그 지루한 속에 다른 의미를 찾는것. 그것에 동기 부여가 되고 행동의 원천이 된다. 목표가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를 움직이게하고 행동할 수 있게 만든다.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인데.. 그건 어떤 의미도 상관이 없는 사물인데..너는 무슨 의미를 결부시켜 너 자신을 괴롭게 하는가.. 어떠한 편견도 없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그렇게..
저는 책에서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 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져 없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지식이라 불러온 것이 사실입니다. 출석부의 명단을 죄다 암기하고 교실에 들어간 교사라 하더라도 학생의 얼굴에 대하여 무지한 한, 단 한명의 학생도 맞출 수 없습니다. '이름'은 나중에 붙는 것,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 믿습니다.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람은 실천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이처럼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갑니다.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인식->인식->인식--- 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위기의식을 느껴라고 '자극을 관리'하라고 다들 소리 지르지만, 정작 나에게 가슴 속 깊이 와닿지 않는 이유는 뭘까라고 자주 생각한다.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일까.. 떠먹여 주는 숫가락에 익숙한 나머지 타성에 젖어서 일까.. 정말 밑바닥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일까.. 벼랑 끝 절박함이란 몰라서 일까.. 취업 아카데미에서의 냉정하고 무서웠던 헤드헌터, 동기부여 강사님들의 말씀 속에서 난 분명히 그 추상적인 '위기의식'이란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당장 20대에 먹고 살 것들.. 결혼은 언제하며 40대 은퇴 후에는 뭘할까..라는 미래에 대한 아무 생각이 없던 내가 앞으로의 '계획'이 필요하단걸 느끼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비록 정년 15년이라지만 부딪히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는건 정말 잘못 된일인 것 같다. 어떠한 직업을 가지더라도 그 내가 살아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살아야 겠다.
여자는 말을 쉽게하는 남자를 조심해야 하고, 사랑발림의 달콤한 청사진과, 비젼을 제시하는 남자를 조심해야 하고, 그 청사진의 트랜스에 빠져 스스로가 혼자만이 만들어 낸 '사랑'이 아닌지를 구분해야 한다. 행동으로 자신을 지켜주는지를, 말뿐이 아닌 남자를 헤아릴수 있는 남자를 찾아야 한다. 그에 반해 남자는 매스미디어에 부추긴 '미'의 기준에 눈이 가려져 그 속내는 보지 못하는건 아닌지, 남성을 이해와 아무런 조건 없는 지지를 보내 주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
하나의 스토리 텔링을 함으로써 시간이 물 흐르듯 가는 것을 오늘 난 느꼈다. 동기부여 강사님의 이야기를 그대로 모델링하여 흉내내였고, 상대는 나의 스토리 텔링에 완전히 몰입되었었다... 즐거운 경험이지 않는가..난 이야기를 하면서 재가가 잡히며 나도 모르게 탄력을 받았다. 그리고 마치 나의 이야기인양 잘도 떠들어 댔다.
책을 읽으면서도 3일이 지나면 까먹고 멋진 연사의 감동적인 강의도 3일이 지나면 흐릿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지속적인 촉매, 자극제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자극의 강도 : 생각 < 말 < 글 < 사진 < 실물(세미나, 강연) 이런식으로 끓임없이 자신에게 최면, 세뇌 시키는 것이다.
위기의식 = 긴장감 = 지속적인 자극 = 죽음의 반대 = 살고자 하는 반대 =
매트릭스의 세뇌 = 반 타성 = 가슴이 두근거림
겉으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마음으로는 섭섭해 하던 친구를 만났다. 하지만 그 섭섭함도 결국 내가 만들어낸 '욕심,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밝고 긍정적인 친구를 나의 처지때문에 이상한 녀석으로 만들어 버리진 않았는지.. 혼자만 생각하고 혼자만 판단하며 끓임없이 상상만 했던 내가 부끄럽다. 반가이 먼저 전화해주는 친구가 얼마나 고마운가 생각해봐라.
요술망치가 있다. 한 번만 내려치면 자신이 원하는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준다. 요술망치와 동일한 효능을 나타내는.. 책, 좋은글, 강의, 감동적인 연사, 영화 역시.. 등등.. 나에게 자극이 될 만한 모든 요소들.. 하지만 그 요술망치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한 번도 '제대로' 내려치지 않았다. 그냥 요술망치의 효능에 카타르시스를 '느낄'뿐이다. 요술망치가 가져다줄 '파라다이스'의 망상만 음미할 뿐이지 정작 눈앞에 있는요술망치를 들려고도 노력하지 않는다. 나는 '특별하다'고? 착각하고 있는건 아닌지.. 요술망치를 가져서 나는 원하는걸 모두 이룰수 있으니까..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자기의 '상상'만으로 그린 영역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란.. 그게 바로 아집이고 왕따다. 피하지 못할 이 경쟁사회에서 '천재'를 이기기는 힘들겠지만 굳이 '천재'와 경쟁하려 하지말고 이기지 못할 까봐 지레 겁먹지 말고 나 스스로가 '미치는게' 우선이다. 비교한다는건 스스로는 좀 먹게 만드는것 뿐이다. 그 '천재'가 가지지 못한 '것'을 너에게는 가지고 있자나..
고수가 하는 것을 배우거나 따라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이 어떻게 고수가 되었는지를 배우고 따라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현재의 전문가들이 하고 있는 행동을 따라하려고 한다. 우선은 따라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설령 똑같이 따라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전문가 흉내내기일 뿐 전혀 전문가적이지 못하다. 행동 하나하나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해결법만 달달 외운 사람은 세상의 모든 문제가 그 해결법을 적용할 대상으로 보인다. 또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창의적이고 상황에 맞는 전문가적 해결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좋은 해결안들만 사전처럼 모아둔 디자인 패턴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병폐가 대부분 여기에서 온다.
어떠한 노력, 행동도 하지 않은채 성공한 자들의 '방법'만 쫓고 있는 내 모습.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며 시간만 보내고 있는 내 모습. 마음편히 앉을수 있는 안락 의자만을 찾고, 어떠한 고생도 하지 않을려는 욕심.그저 '적당함'만을 쫓은채.. 재미없고 시시한 인생.. 성공한 자들의 조언, 책, 말들은 너를 지속적으로 '일깨우기' 위함이지 너를 그렇게 성공한자들 처럼 똑같이 '만들려고'하는 것이 아니다. this is my life.. 나만을 위한 인생. 그렇게 주변의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유혹, 욕망을 뿌리 칠수 없다면.. 진탕, 실컷, 그 진창에 빠져 '확실히' 그리고 빠른 시간내에 즐기고 빠져 나오던가 or 꾹 눌러 참으며 보다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조금만 뒤로 물려 둬라..
여자, 게임, 음악, 영화,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것들..
이제서야 네가 책으로 부터 깨달은 사실은 이미 그 책을 지은 작가보다 한 발 늦음을 의미한다. 모든 정보가 그렇게 세상에 공개된 지식, 정보는 네가 출발선상에서의 스타트가 이미 늦었다는것을 명심해라.
20대 후반 청년의 가장 일반적인 루트. 대학을 막 졸업한 한 청년은 실업 청년 100만 시대에 겨우 턱걸이로 대기업에 아니면 중견 기업이라도 입사하게 된다. 하지만 전공, 직종 불문하고 하는 일이라곤 자신이 속한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일 뿐이다. 아니, 분명 다른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일이 있지만 서도 자신 스스로가 회사의 종이 되어 버리고 '사고'란 이미 잊어 버린지 오래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 젖어 자신이 회사의 부품이 된지도 모른채 그렇게 타성에 젖어 간다. 1. 연애? 결혼? 대학때 풋사랑이 다행스럽게도 사회에 나와서도 유지 되어 결혼이라는 심리적 압박은 덜 수 있게 된다. 성공적인 연애를 통해 그렇게 30초반 즈음에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사슬 때문에 더 이상 모험을 하기란 쉽지가 않다. 자식을 가질 것이고 부양해야할 가족이 생기게 된다. 제 아무리 지지하는 아내라 하더라도 무리한 도박은 반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2번의 경우라면 혼자이기에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다.
2. 연애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 단지 나 자신을 성장 시킬 시간이 필요할 뿐이고, 돈이라는 게임에, 부자가 되기 위한 경험치를 쌓아갈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순간적인 욕망은 스스로 아님 자본주위의 간편함으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부담? 분명한 사실은 이 길이라면 앞서 1번 보다는 확실한 성공을 부를 축적할 수 있고 후에 배우자를 고를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단지 20대후반 30대초반시절 풋풋한 연애, 사랑이 부러워 시기하고 단지 그렇게 영화나 보며 오징어나 빨고 있을 시간에
나는
적당히 공부하는 걸 좋아하고
적당히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좋고
적당히 새로운 기술을 연기하는 것도 좋아한다면 대기업에서
적당한 엔지니어가 웬만큼 성공할 수 있다. 그렇게
적당한 나쁘지 않은 마누라와 똑똑하지는 않지만 밉지 않은 자식들
적당한 중산층이 될 것이며 생활비, 사교육비, 노후자금의 압박을 받아가며
적당한 가정의 한 '가장'이 남편으로써 아비로써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
적당한 인생은 얼마가지 않아 조기 퇴직의 압박을 받을 것이고
적당한 인생이였기에 사업을, 식당을 하더라도 그런 '적당함' 떄문에 '절대다수'의
적당한 사업체, 식당이 되버리곤 만다. 경쟁력이 있을리 없다.
깨달음과 실천 요약, 정리 ----------------------------------------------------------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과 빠른 해결책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 뒤섞일 때 우리는 하나의 행동방식을 선택한다. 즉 자신이 이성적으로 이해한 사실(어떠한 꺠달음)을 가지고 정서적으로도 변화했다고 믿는다. 변화를 머릿속에서 끝내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이미 원하는 것이 다 충족되었고, 자신의 태도 또한 변화되었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감정적이고 이성적인 영향을 동시에 받기 때문에, 정신적인 깨달음만을 통해서는 변화되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자아상이 하나 더 생겨날 뿐이며, 이제 앞으로의 경험을 그 잣대에 맞춰 평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결국 제한적이고 강박적인 낡은 행동방식으로 후퇴한 채, 변화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절감하게 된다. 변화가 쉽지 않다는 생각 속에는 자신의 이상적 자아상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어 있다. 즉 실패한 이유가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외부적인 요소 때문이라는 것이다. ( 좋은책과 글들을 수집하는 것은 그 순간의 깨달음은 있지만 당장에 변화를 실천, 이룰 수 없기에.. 미루는 핑계에 불과하다. 어차피 나중에라도 찾아보거나 역시 실천하지 않는다. 많은 책들을 읽어보지만 항상 제자리 걸음인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이성적인(그럴듯한) 자아상만 계속 늘려갈뿐, 생각만 많아질뿐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가상 시뮬레이션'의 개념이다. '아 그렇구나'가 아닌 내가 이미 그 모습을 행동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주변으로 부터 좋은 자극을 받지만 머리로 이해하고 깨닫는 수준은 얼마가지 않는다. 이해 - 깨달음 - 행동 - 변화- 결과물에서 행동-변화 양식을 끝임없이 '연습'해야지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수 있다. 미래에 그 문제 상황에 최적의 해결책을 내기 위한 방법은 '즉각적인 익숙함'에 있다. 즉, 순발력 오랜동안의 연공으로 인한 즉각적인 반응력을 길러야한다.
피해의식 요약, 정리 ---------------------------------------------------------------
전쟁이나 자연재해, 폭력의 피해자들이 반드시 피해의식을 갖지는 않는다. 어떤 사건이 마음에 깊이 영향을 미쳐서 그 결과 어떤 내면적인 법칙을 형성하게 되었을 때 피해의식이 나타난다. 불쾌하게 느꼈던 상황이나 경험만이 피해의식을 불러일으키며, 유쾌한 체험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부정적인 경험으로부터 얻은 결론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리하여 한때의 경험들이 삶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고정관념으로 변하고, 사람들은 그 안에 틀어박혀 새로운 사고나 도전을 거부하며 살게 된다. 또한 이러한 고정관념을 날마다 반복해 확인함으로써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숙하지 못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어서 모두들 어느 정도는 피해의식을 갖고 산다. 피해의식을 가지면 자신은 연약하며 삶을 건설적으로 이끌어갈 능력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서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의존하게 된다. 피해의식에 억눌린 영역에서는 열등한 자아가 자신의 내면적 경험을 좌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감정을 억눌러서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든지, 아니면 외부를 향해 분노를 폭발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 감정을 핑계 삼아 보통의 경우라면 자제했을 일들을 자신에게 허용한다. 또한 자신이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채, 자신이 발전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도 모두 자신이 피해자이기 때문이라고 정당화시킨다. 이 모든 부정적인 영향은 결국 자아가 약해진 결과이다. 그리하여 바라던 평안함은 사라지고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자기 비하의 감정으로 마음속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올바른 교육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세상엔 완벽함, 완전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식의 '건전한' 인간에 대한 망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한 후유증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결국 피해의식이라는 원전은 '완벽함'에 대한 '강박증'때문인것 같다. 왜 불완전함, 부정적인면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일은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그래서 차라리 수동적인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낳다.
약해도 되는 자유.
피해의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소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약해도 되는 자유'이다. 완벽함과 강함, 그리고 화려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불완전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부정적 성격들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이렇게 피해자의 입장이 되면 상대방에게 무엇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요구를 늘어놓고 남에게 보상을 요구해도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되면 '정서적으로 무절제한' 사람이 될 위험도 있다. 즉 연약함과 두려움, 무기력과 무능함이라는 정서의 낭비 속에서 환경의 변화를 위해 자신은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전혀 없다는 생각말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어느 순간엔가 지금에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이유(과거, 행동양식, 배움, 부모, 외부적인 모든요인들...)가 있다며 스스로를 위안, 합리화 하기 시작했고 어떠한 변화도 발전도 없는채 그냥 정서의 낭비속에 3년 아니 10년을 살아 왔는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경험을 한번 하고 나면 자신의 한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긴다.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여러 차례 확인을 통해 좀더 견고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확인행위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예언이 저절로 성취되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우리는 날마다 확인행위를 통해 내면과 세계관을 새롭게 만들거나 강화한다.( 스스로가 최면에 빠지고, 상처를 입으며, 아픔을 간진하고 또 결국에는 자가치료로 극복해낸다. )
어떤 우월한 존재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생각을 자신의 여러 상황에 적용시킨다. 그래서 자신의 배우자나 사회, 고용주 등을 자기보다 더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조언자, 격려자, 동반자를 찾는 이유는 상대방이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을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 결핍을 자기 스스로가 그런 생각을 날마나 확인하면서 키워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변화시키기에는 자신의 힘이 너무 미약하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더 우월한 존재가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착각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문제는 자 내면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뛰어난 쿨가이가 눈 앞에 있을지라도 백퍼센트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 역시 자신의 역할은 나 스스로가 자가 치료를 하게끔 돕도록 하는 조력자에 불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담 조력자를 찾는것은? 배우자로써 완벽한 현녀를 찾는게 아닌 조력자라면 좋겠다.
좋은 스승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촉진자이거나 협조자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가르칠 때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자기 혁명은 원래 독학이 기본이다.
역시 사람 사이에 사람있고 관심 속에 인연의 끈이 만들어진다. 그러한 조금의 노력, 행동하지 않고서는 인연이 생길 수 없다. 새로운 낯선 사람과의 했던 첫 대화순간부터 상대방에게 평가가 매겨진다. 그리고 그 첫 만남에서 교감하였던 평가로 인해 인간관계의 출발이 시작된다. 하지만 대화중에 굳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가 아닌 나에게 이로움이 될까가 아닌 진심으로 호응하고 즐겁게 대화를 이뤄봐라. 그러면 자연히 상대방이 먼저 긍정적인 반응을 할 것이다. 상대방은 사랑, 친절, 도움을 베풀려 하지만 나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으로 상대방을 위심 먼저 한다.
억압된 의식이 표출된 다는 의미에서 꿈이나 인터넷이 비슷한 경우지 않을까.. 현실에서 충족하지 못한 욕구는 꿈(몽정)을 통해서 해소하고 인터넷을 통해 소비, 대리만족 한다.
아버지와 오랜만의 대화중에서 느낀점은. 매번 똑같은 이야기지만 '현실'을 짚어 주시는 이야기시고, 아버지라는 역할의 무거움이였다. 떠먹여 주는 숟가락에 익숙해진 나머지.. 어떠한 감사도 표현하지 않는 버릇없고 철없는 현세대들.. 어떠한 노력도 없이 변화를 생각한다는 것은 삶의 전멸을 의미한다.. 즉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왜 자꾸 나를 평가 절하 하는가.. 이것 저것 다 고민 되는가? 그러면 "모두 다 해버리면 된다는" 관점의 전환은?
무턱대고, 너의 감정만 흥분한채 상대가 이해할것 이라고 바라는가? 그 친구의 현 상황과 감정상태가 어떤지도 모른채 고려하지 않은채 너의 감정만 표현한다고 해서 과연 상대가 이해할 수 있을까? 차근히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 앉힌채 대화하라. 이는 모든 상황에 적용된다. ( 전화통화, 헌팅, 소개팅, 면접 등등 ) 그 상황에 맞는 분위기로 어조로 준비가 되었다면 그 이후에 '치열하게' 대화하라.
친구들이, 부모님이, 여자친구가.. 다른 모든이로부터 이해를, 격려를 바라나?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에서 고민거리와 스트레스로 투쟁 중이다.. 그 치열한 와중에 너에게 조금 시간을 쪼개어 관심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에 감사해야하며 그런 관심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형식적이다해서 섭섭해 할 것 없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온전히' 이기적이다. 자신의 삶 이외에는 타인의 관심은 1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바보같을 뿐이다. 상대는 너에 대한 관심도, 시기도 그렇게 네가 생각하는것만큼 '크지' 않다. 세상에서 많은 인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살아가지만 그 네트워크 경계는 종이 한장에 지나지 않다. 홀로 살아갈수 없는 세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네트워크에 온전히 매혹, 몰입하며(감정적으로 기댐) 자신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하며 섭섭해 할 것도 아쉬워할 것도 없다. 결국 자신의 삶은 '하나'뿐인 것이고 그 삶 속에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네트웍을 통해 취할 것만 취하면 되는 것이고 나눠줄것만 나눠주면 되는 것이다.( 격려, 지지, 관심, 사랑, 이해, 배려, 등등..) 결론은 부모님, 친구, 연인, 와이프, 이 모든 인간 네트웍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가까운 벗이자 '완전한 타인'인 것이다.
하지만 가장 끔직한 것도, 고립감이다.
이 세상에서 어디에라도 발 붙힐 곳이 없다는 것은 '혼자'남겨 진다는 쓸쓸함은 참으로 지독하다. 인간의, 세상의 네트워크에 단절된다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존재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회적인 동물, 사람 사이가 아니라면 존재 할 필요도 없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
가장 가깝고도 먼 친구란..
허울 뿐인 친구 역시라도.. 네가 알게 모르게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 안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될 것이다. 혼자 스스로의 고립은 사회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은 스스로 혼자서는 버텨낼 수 없다. 휴먼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 가기에 '인간'이라 한다.
그런 얄팍하고 유치하기 까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섭섭함을 느낀다면.. 너야말로 '소인배'인 것이다. 상대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개의치 않고 있을수도 있을수도 있지만 그것은 중요한 요지가 아니다. 이를 통해 친구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내 삶에 어떤 부분을 차지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가장 가까운면서도 완전한 '타인' 인 친구.. 힘든 시기에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은 많은 위로가 된다. 이유인즉슨 너만 낙오자가 아니라는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철저한 객관적인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여자들을 무서우리 만큼 태연한 얼굴을 한채 쉽게 사랑에 빠져든다..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남자들보다 젊은 시절 성적인 매체를 적게 접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평균적으로 남성보다는 순수하다. 그렇기에 '연애'라는 춤사위에 쉽게 몰입하고 무서우리 만치 '완벽히' 벗어날 수 있다. 남성이 매체로 부터 발아된 그런 성적 욕망들은 헤어짐을 통보한 여성들에게 목이 메이는 원인이 된다. 여성들은 그런 매체로 부터의 자극이 훨씬 덜하기에 남성들만큼 '아쉬움'이란 훨씬 적다. 그것이 이별에 쉽게 대처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게다가 그 덕분에 순수하기에 다른이와 사랑에 쉽게 몰입할 수도 있다. 젊은 시절 다소 적었던 매체들은 중년기에 접어들어 성숙해져 발아 되게 되고, 시들해진 남성의 중년기는 여성의 중년기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된다.
'인 척..'
훌륭한 배우일수록 순식간에 그 캐릭터에 몰입해 들어 간다. 뛰어난 인간일수록 순식간에 필요한 캐릭터가 되어 버린다. 한 영화에서 일인 다역을 하는 뛰어난 배우는 '탁월한 복제자'이다. 마음껏 원하는 심상을 이미지로 그리고 그 필드 상자로 완벽히 들어가 버린다.
존재성의 확립. 이미 원하는 캐릭터가 되어 있다고 가정하고, 아니, 가정이 아닌 정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상태가 된다면 나머지는 즐길, 음미할 일만 남을 뿐이다.
삶의 춤사위를 추기도 전에 나는 너무 겁먹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채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만을 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은 확인 되지 않은 일어 나지도 않은 거짓이다.
친구는 얼굴이 잘 생겼다, 머리가 똑똑하다, 집이 부자다, 유산이 많다, 사회적 지위가 높다. 친구가 좋은 학점을 받았데, 좋은 직장엘 취직했데, 이번에 승진을 했데, 마누라가 이쁘데, 자식이 똑똑하데, ....어째서 다른이, 타인보다 가까운 친구에게만이 더욱 직접적인 열등의식을 가지게 될까.. 신문지상이나 다른 매체로 부터 성공한 이들에게는 바로 꼬리를 내리며 인정하고 배우려 들지만 오히려 가까운 친구가 그런 성공이라면 질투를 불러 일으킨다. 아들러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으로 부터 인정받고픈 욕구에서 모든 동기 의식이 일어나게 된다. 이 원초적인 욕구에서 모든 행동 양식들이 생겨 난다.
매스미디어가 만들어 놓은 '성공' 이라는 틀에 맞추어 지지 못하면 역시나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혀 버린다. 그런 사회가 만들어놓은 '성공 강박증'에 벗어나자.
조건결혼. 돈,조건 때문에 결혼하는 속물들을 자기의 허물을 덮기 위한 그런 상황들을 통해 합리화, 변명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이들을 욕하는 너는 얼마나 세상에 떠떳이 살아 왔는가!
세상에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기 때문에 만들면 다 명분인 것이다.
즉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ㅋ
별것도 아닌 과거로 인해 자신을 갈아 먹지 마라.
인간의 익숙함과 망각은 정말 섬찟할 정도이다. 하루 아침 어제 지난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며 좋은 자극과 깨달음들은 어느덧 먼 기억으로 치부되어 버린다. 익숙함이란 왜이리도 잔인한가.. 처음 낯선 장소에서의 했던 많은 다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망각의 저편으로 넘어가버리고 어느덧 나쁜 생활패턴인 익숙함으로 변질되어져 있다.
현실감'이 아닌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 스스로가 판단한 잘못된 부정적인 트랜스로 인한 '현실감'이 아닌, 어떠한 너의 주관도 배제 된 살만한 세상인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소유와 물질욕 끝이 없다. 하드 디스크의 수많은 자료들을 날리며 생각나는 한 구절.
"우리는 소유를 하는것이 아닌 소유 가짐을 당하는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고민하고 스스로를 자꾸만 몰아간다. 정신없고 눈코 뜰새 없다면 그런 생각할 여유 조차 허락할리 없다.
혼자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괴롭다. 난 외롭지 않다 하지만 결국 이겨내지 못한 현실에 몇번 이고 좌절한다. 날 점점 나약하게 만든다. 스스로의 시간을 충분히 만족할 만큼의 생산적으로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어떠한 성취도 없는채 제자리 걸음인듯한 상황이 힘들게 만든다. 그런 낭비적인 에너지들이 나를 더욱 깎아 내리는 것 밖에 되지 않고 그런 소비적인 에너지를 밖으로 표출해라.. 생산적인 것들로..
어떠한 실천, 행동도 하지 않은채 사색만 할뿐.. 너 자신에게 물어봐.. 행동하고 있는지를 말야.. 좋은 책들과 글귀를 읽고 깨달음을 알지만 거기서 그친다. 외부, 주변으로 부터 오는 정보는 감상하고 음미할 대상에 지나지 않다. 효용있는 가치는 스스로의 행동에서 나온 '산지식'뿐이다. 지금 너의 겉모습에서 너의 처지를 나타내고 있자나..스스로에게 물어봐라.. 물러서지 말고, 도망만 치지말고.. 변화는 놀림감을 받을 두려운 현실을 인정하는 용기에서 부터 시작된다..
익숙함에서부터 오는 부품화.. 세태에 파묻힘.. 제 아무리 생산적인 환경에서라도 끓임 없는 자각 없이는 다시 이전 습관적으로 소비적인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편안함은 중독성이 있다. 머리가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손쉽다. 간편하다. 번거롭고 귀찮음을 싫어하는 습관이 그것들에 중독되게 만든다.
위기의식.. 지식근로자, 자본주의, 한 사람이 살아 남지 못하면 나머지가 죽는 경쟁사회의 세상에서는 성장, 변화 하지 않고서는 버텨내기 힘들다..
친구, 배우자, 부모님.. 어떤 누구도 나 자신 전부를 온전히 다 이해해줄 수는 없다. 상대는 내가 아니다. 머리속 전부를 다 알수는 없다. 상대에게 섭섭함을 느끼는것, 인간관계에서 항상 2%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전부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상대가 이해해주길 기다리는 것 보다 반대로 내가 상대를 이해하려고 격려하고 응원해줄수 있는사람이 되는게 더욱 보람차고 가치있는게 아닐까..
덕분에 상대는 힘을 얻고 스스로가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다. 대가를 바라기보다는 베푸는 삶 그 자체가 행복한 삶이다.
온전히 나 자신을 다스리고 통제할수 있는 날이 온다면 정말 멋진일이지만 당장에 그렇지 않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 역시 없다.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과정 그 자체가 조금씩 나 자신에게 성장하고 있다는 성취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해, 대가, 보상을 바란다면 다시 항상 2%가 부족한 만족하지 못한 상태로 돌아 갈 것이다.
이해 배려 할려고 하지말고 때로는 밖으로 소리도 지르고 해야 표출시켜야 정신도 감내한다.
욕구, 욕망과 동기의식은 동일한걸까? 몸에 나쁘다는걸 알면서 담배를 피우는건 욕구에 따른 감정이다. 비만을 불러일으킨다는 인스턴트식품을 먹는것은 식욕에 대한 욕구를 따르는 감정이다. 자위를 하는게 허탈감을 가져 올수 있다는걸 이성으로 알지만 하는건 성욕의 해소에 따른 욕구이다. 이렇게 욕구들이 모두가 소비적인것만일까? 어떤것을 하고자 하는 의지, 즉 동기부여가 필요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어떠한 욕구가 발생해서 생성되는 것이다.
진심어린 격려.. 잠시나마 격려가 되었다. 그것이 아첨이든 진심이 됬던.. 나에게는 잠깐이지만 왠지 모를 용기와 자신감이 생겼다. 왜 타인만이 나를 격려 할 수 있을까.. 내가 나 스스로를 격려 할 수는 없을까?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인가.. 내가 나를 평가한다는건 객관성이 결여 되어있기 때문에.. 결여 되어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장 혹독한 비평가 이기 때문에..평소 나 스스로가 비참하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왜? 가 아닌, 결과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어떻게? 를 생각해보자. 이 상황을 벗어 날 수 있을지를.. )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거칠게 없다. 꺼릴게 없다. 어떠한 정신적인 고민과 장애물 조차도 부수어 버리고 통과 해버린다.
이 불안함.. 제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제자리인것 만 같은.. 충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부정적인 오로라가 나의 정신을 잠식해 버리고 만다. 이래서 정식적인 지지자, 격려자, 조언자란 살아가면서 필요하다..
가장 강력한 세뇌, 최면은 스스로에게 거는 것이다. 어떤 영향력(책, 사람, 모든 정보)을 통해 인지하고 나 스스로가 가진 사고체계로 부터 OS를 구축하기 시작하고 스스로가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신념, 가치관, 스스로가 내린 합리화는 너무나 견고하고 단단해서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다. (치밀하게 계산된 허구의 세계에 감금된 상태를 말한다.) 그릇된 가치관, 즉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력을 가질수 있는 신념이 있음에도 헤어날 수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 인터넷, 활자..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인지하는 모든 것들로 부터 사고체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어떠한 의식적인 노력없이는 그 모든 것들의 망각을 통해 아무런 성장없이 시간 낭비만하는 꼴이 된다. 창의성, 아이디어라는건 어떠한 의식적인 필터에 의해 걸러져 나온다. 모든 정보를 수용하지만 그러한 노력 없이는 헛수고이다. 어떠한 키워드, 필터.. 이게 절실하다.
진정 현명한자는 말이 많지 않다. 타인의 감정을 먼저 이해하고 배려한다. 자신의 섭섭함보다는 상대 역시 하나의 오랜 사연을 가진 인간일 뿐이라 생각한다. 인생이란 고독한 레이스다. 주변의 지지자가 있다는건 큰 힘이 되기는 하지만 그건 얼마가지 않아 인간의 익숙함에 편협한 것이 되버리고 다시 만족을 그칠줄 모르게 된다.
배움이란 내가 가고 있는길에 음미할 대상에 지나지 않다. 오히려 그 배움으로 인해 아쉽거나 우쭐해 질 수 있다. 물론 많이 보고 듣는 것들을 통해 욕심이 생겨날 수 있다. 인정받고 싶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아직 배움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완성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배움이라는 숙명. 그 덕분에 마음이 묶인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이겠지만 그 앎의 깊이 만큼의 내 마음, 정신을 소유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그것이 우리 자신을 소유해버린다. 애욕이 생기고, 배운 그만큼의 욕망, 번뇌가 생긴다 원래부터 무지한자들은 그러한 욕심도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항상 세상을 약간의 눈높이 위에서 내려다 보듯이 보자. 그러면 자신에게 여유가 생길것이다. 그래.. 부모님 잘 만나서, 얼굴이 잘 생겨서 모자를 것 없이 잘 자라겠지. 그리고 나름대로 누리고 살겠지.. 세상이 판단하는 기준이나 겉으로 보여지는게 부족할 수 있지만 나는 더욱 가치있는 것을 통찰하고 있다.
모든 관계의 실패 원인은 '아쉬움'에서 시작한다. 여자친구가, 와이프가, 부모님이, 절친한 친구, 직장상사, 선배, 후배가 자신이 뜻하는 데로 움직여 주지 않아서 섭섭한가? 자신을 이해해주고, 격려해주고, 보살펴주지 않아서 아쉬운가? 받기만을 원하는 관계는 항상 100센트 만족 시킬수 없다. 어느것 하나 족하면 또 다른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상대의 입장에서 '바쁘겠지.., 사연이 있겠지..,'라며 왜 이해해줄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가.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서 사람은 온전히 자신 하나로 존재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런걸 굳이 '고독'이라는 허물을 덧씌울 필요까지 없다. 그냥 그렇다라고 받아 들이면 되는거지.. 내가 그러하지 못하다고 고독하니 쓸쓸하니.. 이런 자신에게 거는 부정적인 세뇌가 더 멍청한 짓이다. 자신이 스스로의 감정을 취할건 취하고 버릴건 버리며 '그냥' '그렇게' '존재' '하면' 되는거다..
방어기제.. 나는 지금 현시점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생활태도, 습관이 어떤가 스스로 평가 해봐라. 마음의 상태, 기분, 성격, 주변으로부터 인지, 영향을 받음, 그 주관적, 객관적 모든
---------------------- 아들러의 사회적 관심과 개인심리학 -----------------------
사람은 목표를 선택하며, 그 목표에 따라서 인식하고 사는 동안 내내 이 모든것이 마치 사실'인 것 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현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특정한 개인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이에 아들러는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다'라고 진술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의 상상이나 신념에 따라서 행동하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며, 기대하는 대로 삶을 구성하고자 한다는것이다. 따라서 열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우월해 보임으로써 보상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충족적 예언. 한마디로 말해서, 개인의 행동은 그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독사가 실제로 나의 발에 접근하고 있는 것과 내가 단지 그것이 독사라고 믿는 것은 동일한 효과를 나타낸다. 그는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행동하며, 그의 신념을 지지하도록 사건을 구성하고,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면 그들이 그의 뜻대로 행동하도록 자극할 것이다.그러고 나서, '자 보세요. 내가 옳았잖아요.'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정당하다고 느낄 것이다.
사람 자체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가 중립적인 것이다. 아들러는 우리의 운명이 최선이 되도록 하느냐 최악이 되도록 하느냐는 바로 스스로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매스미디어에서 설정한 '이상'을 사람들이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결과는 열등감이다. 아들러 심리학에 따르면 사회적 관심이 동기가 되어 타인과 협력하면서 완전을 향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생활양식으로 간주되는 반면, 사회적 관심과 협동이 결여된 자기중심적인 우월성의 추구는 신경증적인 생활양식으로 간주된다. 열등감 콤플렉스는 열등감을 은혜하기 위해서 신경증적인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경우를 가르킨다. 아들러는 열등의식을 부정적인것만으로 볼게 아니라..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자극제로 보았다. 열등의식이 없고서는 성장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은 그가 일원인 집단에서 소속하고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은 집단내에서만 자기 자신을 성취할 수 있다. 소속이 없이는 인간은 상실과 무의미에 빠지게 된다. 이때문에 사람들이 소속과 지위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갖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우리의 사회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며, 또한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을 박탈하는 것이다. 이런 열등함에 대한 두려움과 지위를 박탈당할까 봐 두려워 하는 것은 우리의 경쟁적인 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신경증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단지 그것이 어느 만큼 밖으로 표출되었느냐에 따라 정상, 비정상이라 판가름한다. 정도의 차이이지 모두가 열등의식으로 인한 신경증을 가지며 스스로가 다스르기 나름에 따라 완전체에 이룰수 있느냐 없느냐가 정해진다. 열등의식을 보호하기 위한 자신의 방어기제는 어떤 식으로든 표출됨으로써 스스로의 주체성을 보호한다. ( 연애초보들이 이론에 빠삭함으로써 소위 선수들만큼이나 할 수 있다는 대리만족을 느낀다던지, 형편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겉을 화려하게 치장한다던지, 외모컴플렉스가 있는자가 그밖의 능력이 특출남으로써 자신의 결점을 무마한다던지. 아. 이 부분은 나쁜의미만은 있는건 아님. 성적인 욕구불만은 음란물에 심취하게 되고 자위를 통해 간접적으로 해소하게 된다.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으로 해소함으로써 무언가 미진함이 남게 되고 자책감과 점점 불안감만을 증대시키고 있다. ) 신경증의 핵심은 바로 낙담에 있다. 이런 염세적 측면은 사람들이 교묘하게 그들의 낙담을 감추기 때문에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금껏 형성해온 나의 성격들은 모두가 신경증으로부터 왜곡된 생활 양식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어떻다', '개의치 않는다' 이런 판단하는 말을 밖으로 낸다는건 그만큼 의식하고 있다는 말이고 그게 옳은 것이든 바르지 않던간에.. 염두는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인터넷, TV, 가족, 친구, 이 모든게 단절 되니까 답답하다.. 익숙하지 않다.. 어 그러니까 지금의 난 사회로부터의 단절된 느낌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다. 아들러가 말한 사회적 관심.이 결여된 상태가 바로 이런걸까.. 그러기에 방을 들어와도 편치않다. 외부와의 소통이 간절해져 이유없이 누구와 대화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일어난다. 간간히 이루어지는 친구들과의 식사, 대화는 전과는 다르게 나에게 무척 생각이상으로 즐거움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들러는 모든 문제를 인간관계의 문제로 보았다. 여기서 대인관계의 문제는 그 사람의 생활양식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곧 그 사람의 주관적 인식과 신념, 가치관 그리고 삶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가 개인의 생활양식을 형성하며, 이런 통일되고 지속적인 생활양식이 개인의 행동과 삶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러 심리학의 관점에서 볼때 개인의 변화와 성장은 그의 잘못된 생활양식의 수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아들러 상담 및 심리치료는 개인의 문제 해결이나 증상의 치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주관적인식과 동기의 수정을 강조한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살라가면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삶의 사건 자체가 위기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삶의 경험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위기가 인생의 실패를 자초할 수도 있고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주관적 인식과 태도 및 책임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아들러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 그리고 성장 가능성을 믿었다.
"인간은 자기 운명의 희생자가 아니라, 운명의 주인이며 창조자다. 우리 모두는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상적인 미래 사회는 인류의 진보를 성취할 것이다 "
진심.. 타인의 관심을 받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나 스스로 부터가 나 자신에게 후회하지 않을만큼 삶의 자세에 진지하게 임해봐라.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완성되어 있지 않고서는 상대방을 성장, 격려 하기란 쉽지 않다. 와중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어느 풍파에 쓰러질지 모르는 위태한 상태가 계속 될 뿐이다. 어느 하나 진심이 느껴지는 곳이 없다. 마구 난도질한 자소서, 왜 필요한지도 공부해야하는지도 모르는 명분을 잃어 버린 토익시험, 어떤 회사에서 어떤일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는 자세..진지한 고민이 없고서는 진솔한 마음, 글이 나오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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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진심.. 처음에 단지 마음이나 얻어 볼까하는 우쭐한 마음에 작업 아닌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게.. 시간이 가고 노력과 정성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쉽지 않다는것을 느끼게 된 후 진지한 자세로 임하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감정, 마음보다는 게임으로 시작한 나이지만 그게 점점 '진심'을 닮아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결국 상대도 마음을 열게 되고 사랑을 얻게 된다. 그때는 이미 난 상대의 '마음의 포로'가 된 상태이다..
모든 연인들의 시작은 이와 같은게 아닐까.. 위의 예시는 단지 동기가 다소 불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일차적인 호감의 상징인 외적인 부분에 반응하는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것 같다. 일반적인 만남, 친구의 소개, 주변의 자연스러운 접근 이 모든것들 역시 서로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무지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2% 부족한 인간관계..